여러분들은 로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때 역사상 최초로 세계 제국을 이룩한 로마는 오늘날까지 문화,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주고 있는데요. 특히 건축 분야에서 고대 로마인은 훌륭한 엔지니어였습니다. 콜로세움, 판테온 같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기념비적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로마인들은 이전의 기술을 개선하고 활용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로마인은 아치, 볼트, 돔 등의 구조기술이나 콘크리트를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건축 및 토목 사업에 널리 활용하였습니다. 건설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도시 '로마'를 당대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로마가 보유한 특출난 인프라 중 하나는 바로 도시에 깨끗하고 풍부한 물을 공급하는 수도(水道)입니다. 수도는 인구 백만의 도시 로마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아피아 수도(Aqua Appia Aqueduct)
티베르 강을 끼고 있는 로마는 물이 부족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점차 커지며 물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는데요. 그로 인해 만들어진 로마의 첫 수도가 기원전 312년 건설된 아피아 수도(Aqua Appia)입니다. 로마의 도로나 수도에는 건설 총책임자의 이름이 붙는데요. 아피아 수도는 로마의 정치가인 아피우스가 건설하며 아피아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피우스는 앞서 나온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의 유래가 된 아피아 가도 건설의 총책임자로도 유명합니다. 아피아 수도는 수원지에서 16.4km의 거리를 흘러 로마에 도달했습니다. 아피아 수도의 대부분 구간은 지하에 있습니다. 지하에 만들어진 수도의 길이는 지상 구간의 185배였습니다. 이는 전쟁 시에 수도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지하 수도는 수온 상승과 물의 증발을 막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 내부(냉탕)
아피아 수도를 시작으로 3세기 무렵까지 로마에는 11개의 수도가 건설되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수원지의 물은 도시의 주요 지역을 흐르며, 분수를 비롯한 공공시설에 공급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풍부한 물을 제공하는 공공장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요. 이러한 수도가 주는 편리함은 로마의 생활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공중목욕장, 공공화장실 등 로마의 생활 문화는 당시 최고 수준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도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비르고 수도의 물을 공급 받는 트레비 분수
로마인들은 건설 사업에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로마의 정치가로 유명한 아그리파도 판테온, 공중목욕장 등 로마의 공공시설 건설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아그리파는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과 싸운 악티움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장군으로 유명한데요. 아그리파는 로마의 11개 수도 중 율리아 수도(Aqua Julia), 비르고 수도(Aqua Virgo), 알시에티나 수도(Aqua Alsietina)를 건설했습니다.
이 중 율리아 수도는 로마 시내 동쪽에 물을 공급했고, 수질이 좋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고의 수질을 가진 수도는 비르고 수도였습니다. 비르고 수도는 로마 최초의 대규모 공중목욕장인 ‘아그리파 목욕장’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비르고 수도는 로마 제국이 몰락하며 파괴되었으나, 15세기에 대대적으로 복구되었습니다. 현재 스페인광장과 트레비분수에는 비르고 수도의 물이 공급되고 있다고 합니다. 라틴어인 ‘비르고’ 대신 이탈리아어인 ‘베르지네’로 불리는 이 수도는 로마 시내의 많은 분수에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알시에티나 수도는 아그리파가 죽은 뒤에 완공되었습니다. 알시에티나 수도의 물은 수량도 적고 수질이 나빠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물은 어디에 사용되었을까요? 알시에티나 수도는 공장 밀집 지역에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알시에티나 수도로 공급된 물은 로마 시내의 커다란 저수지에 모였다가, 저수지에서 불순물이 걸러진 후 각 공장으로 공급되었습니다.
프론티누스 저서 ’로마 수도론’에 나오는 아쿠아 클라우디아(Aqua Claudia)
로마 제국의 수도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습니다. 여기에는 1세기에 활약한 물 감독관 프론티누스의 저서가 큰 도움을 주었는데요.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프론티누스는 ‘로마 수도론’을 저술하여 엔지니어로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로마 수도론은 로마 수도의 수원, 길이, 기능 등을 설명하고 있는 보고서입니다. 프론티누스 시대에는 멀리 떨어진 샘물이나 하천에서 로마로 물을 끌어오는 9개의 수도가 있었는데요. 9개 수도의 물은 수질이 다양했는데 가장 좋은 물은 마시는 물로, 가장 나쁜 물은 인공 호수와 관개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연구자는 프론티누스의 설명을 바탕으로 당시 로마인이 수도를 통해 사용한 물의 양을 계산했습니다. 해당 연구는 로마의 중산층과 하층민은 수도를 통해 하루 1명당 67리터의 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빗물 및 티베르 강에서 길어온 물을 더하면 적은 양이 아닙니다. 사실 로마인이 사용한 물의 양에 대해 일치된 의견은 없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1명당 하루에 1,000리터 이상의 물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서울시의 1인당 하루 급수량은 약 298리터입니다. 다만 필요시에만 사용하는 현대 수도와 달리 고대 로마의 수도는 사용하지 않아도 물이 계속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로마 고대 식수대
로마인 대부분은 생활용수를 공용 수조에서 가져왔습니다. 공용 수조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해도 집에서 40m만 걸으면 됐다고 합니다. 집까지 수도로 물을 공급받는 사람은 부유한 소수였습니다. 수도를 통해 물을 얻기 위해 주고받는 뇌물도 성행했다고 합니다. 프론티누스는 수도의 물을 몰래 끌어가기 위한 파이프가 로마 내에 광범위하게 있다고 언급했는데요. 이런 파이프를 철거하여 상당한 양의 납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는 수도관의 재료로 흔히 납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납 수도관은 19세기 후반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의 인구 감소가 납 수도관 때문이라는 가설도 제시됐는데요. 수원지에서 도시 입구까지는 납관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시 내에서는 연성이 좋아 쉽게 휘어지는 납관의 사용이 편리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수천 개의 수도관이 있었습니다.
인체에 흡수된 납은 대부분 뼈에 축적됩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고대 로마인의 뼈를 분석한 결과, 로마인 뼈의 납 농도가 정상보다 높은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하지만 수도관이 납 중독의 원인으로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물속에 포함된 고농도의 칼슘이 납 수도관 내부에 두꺼운 침전물을 만들어 납으로부터 물을 보호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평균 경사도 0.2~0.5%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 수도 모습
뛰어난 도시 건설자인 로마인들은 멀리 떨어진 수원지로부터 물을 공급하기 위해 경사를 사용했습니다. 물이 끊기지 않고 흐르기 위해서는 낙차를 일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는데요. 수도는 평균적으로 0.2~0.5%의 일정한 경사도로 만들어졌습니다. 경사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건축 기술도 다양합니다.
꾸준한 내리막길을 만들기 위해 둘러 가기 힘든 언덕에서는 터널을, 골짜기에는 다리를 사용했습니다. 골짜기가 넓거나 깊지 않은 경우에는 사이펀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터널에는 수도를 청소하거나 조사, 보수하기 위한 수직관도 만들어졌습니다. 터널에서 나온 쓰레기는 수직관의 입구 옆에 버려졌는데, 이 쓰레기 더미를 보고 버려졌던 수도가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 사이펀 방식 :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골짜기 반대편의 물을 밀어 올리는 방법
로마로 물을 운반하는 수도는 먼지와 흙과 같은 불순물에 오염되지 않도록, 또 햇빛에 의해 증발하지 않도록 덮여있었습니다. 수도의 단면은 직사각형으로 0.5~2.0 미터의 너비와 1.5~2.5 미터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세 개의 수도가 겹쳐 있는 예도 있는데요. 물의 수요가 증가하며 수도 위에 수도를 추가한 것입니다.
로마 저수조의 물 공급 방식인 카스텔룸
로마 근처까지 내려온 물은 도시에 도착하기 전 저수조에 모입니다. 저수조에서는 퇴적물이 가라앉고 도시로는 깨끗한 윗물이 공급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저수조는 우선순위에 따라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저수조는 ‘카스텔룸’이라고 불렸습니다. 프론티누스는 9개의 수도에 카스텔룸이 몇 개 있는지를 기록했는데, 아피아 수도의 경우 20개의 카스텔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퐁뒤가르 수도교
때에 따라 수도는 계곡을 건너야 했고, 이를 위해 수도교(Aqueduct)라는 건축물이 생겼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퐁뒤가르 수도교(Pont Du Gard)’와 스페인의 ‘세고비아 수도교(Segovia Aqueduct)’가 대표적입니다. 이 수도교들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퐁뒤가르 수도교는 물 뿐만 아니라 사람도 통행하는 다목적 수도교입니다. 서기 1세기경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길이 273미터, 높이 49미터, 3층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단의 아치는 모두 길이와 너비가 다릅니다. 1층은 6개의 아치, 2층은 11개의 아치, 3층은 35개의 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맨 위층의 수도관은 파손되었고, 맨 아래층에서 사람만 통행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세고비아의 수도교
세고비아의 수도교도 기둥에 새겨진 기록에 따라 서기 1세기경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2개 층의 아치 수도교는 총 길이 728미터, 최대 높이는 28.5미터에 이릅니다. 시멘트, 꺾쇠 등의 접착 부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단지 커다란 화강암을 정교하게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로지 중력에 의해 2천년을 서 있었고, 여전히 광장을 가로지르며 로마 시대의 기술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도시 로마의 수도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수백 개의 수도가 건설되었습니다. 로마의 수도는 이탈리아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스페인, 프랑스, 레바논, 터키에서까지 유적을 찾을 수 있는데요. 이렇게 많은 수도의 건설은 실용성과 건설을 중시하는 로마의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5세기경 로마 제국이 쇠락하며 수도의 사용도 줄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자에 의해 수도가 파괴되기도 했고, 도시 인구가 줄면서 유지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식수부족과 잦은 전쟁과 질병 등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 백만 명이 넘던 인구는 중세 시대에 3만 명까지 감소하며 점점 쇠망하게 됩니다. 결국 1453년 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들의 건설 유산은 현재까지 남아 고대 로마의 기술력을 자랑하며 오늘날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 원문 : 한국건설기술인협회지 ‘건설기술인’, 2017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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