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과 인류] 광화문 광장 : 역사 · 문화 · 사람이 모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소'를 꼽으라면 어떤 장소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2016년 추운 겨울, 많이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던 광화문 광장이 떠오릅니다. 당시의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남겠지요.
6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광화문 광장의 현재 모습은 2009년 단장되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육조거리, 광화문통, 세종대로, 광화문 앞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지요. 그리고 이름만큼 장소가 지녀온 의미도 다양했습니다. 여기서는 이름에 따라 광화문 광장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육조거리
조선시대 광화문 (출처 : 광화문광장)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임금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광화문 앞의 거리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조 관아가 늘어서 있어 육조거리라 불렸지요. 이 육조거리는 임금이 행차하는 거리이자 행정구역이었고, 조선시대 가장 넓은 길이었지요. 사람으로 북적이는 장소였음이 분명합니다.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을 비롯한 유생들이 집단농성에 들어간 자리도 육조거리였습니다. 이때에도 육조거리는 민심을 전하는 장소였나 봅니다.
육조거리의 복원 배치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경복궁과 육조거리의 설계에는 이성계, 정도전, 무학대사라는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성계는 한양 천도를 결심하고 궁궐 건설을 정도전과 무학대사에게 맡겼지요. 정도전은 궁궐 배치를 남향으로, 무학대사는 동향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중에서 정도전의 안이 선택되었고 경복궁은 남향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경복궁은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산과 관악산의 연주대를 연결한 일직선의 축에 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관악산 불의 기운이 너무 강하다는 무학대사의 말은 무시할 수 없었지요. 이에 광화문 앞에는 불을 먹는 해태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경복궁으로 바로 향하는 관악산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육조거리는 동쪽으로 약간 꺾어진 모양으로 배치했지요. 이것이 육조거리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도시 축에서 비스듬히 틀어져 있는 이유입니다. 광화문 앞 130m까지는 경복궁과 같은 축으로 길이 만들어졌고, 그다음부터의 육조거리는 북한산, 경복궁, 광화문,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도시 축과 미묘한 어긋남을 가지고 있답니다.
광화문통
일제강점기 광화문 (출처 : 광화문광장)
육조거리는 일제강점기에 광화문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일제는 조선시대 궁궐과 도시를 크게 훼손시켰습니다. 경복궁 내 전각들과 광화문, 육조거리도 훼손 대상이었지요. 일제는 경복궁 내 전각들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앞을 가리는 광화문은 철거하여 경복궁 동쪽으로 이전시켰지요.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도시 축이 아닌 남산을 향하는 새로운 축을 만들도록 건설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첨탑은 경성부청사(구 서울시청사, 현재 서울도서관)와 남산에 세워진 일본 신사인 조선 신궁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었지요. 북한산, 경복궁, 관악산으로 연결되던 도시 축은 5.6도 틀어졌습니다. 또, 육조거리의 중앙에는 도쿄의 상징목인 은행나무가 심겼습니다.
세종로
1988년의 광화문 (출처: 한국조경학회지)
광복 후 육조거리의 명칭은 세종로로 바뀝니다. 일제에 의해 이전되고, 6·25 전쟁의 폭격으로 하단부만 남아있었던 광화문은 1968년이 되어서야 복원되었지요. 문제는 광복 후 일제 침략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철거비용, 건축적 가치 등을 이유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계속 사용되고 있었던 점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앞으로 복원되기는 했는데, 원래의 위치와 다르게 3.5도 틀어졌습니다. 도로 확장 때문에 본 위치에서도 뒤로 14.5m 밀려났습니다. 1968년의 광화문과 세종로의 복원에는 근대화의 치적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컸습니다. 복원보다 현대화에 의미를 두었지요.
광화문은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되었습니다. 세종로는 폭 100m의 도로로 확장되었고, 차량 통행과 군사정권의 각종 시가행진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종로에서 보행자는 차량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지하도로 이동하였지요. 세종로는 시민 위에 존재하는 권위를 보여주는 공간 같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심겼던 은행나무도 세종로 중앙에 그대로였습니다.
도시 축도 여전히 경복궁을 막아선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시작하여 광화문,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으로 이어졌지요. 그 시기의 세종로는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장에 대한 과시와 군사정권에 대한 찬양에 사용된 공간이었습니다.
광화문 광장
2013년의 교황 방문 때의 광화문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현재 광화문 광장의 모습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경복궁 내의 조선총독부, 경성부청사, 남산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던 훼손된 도시 축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야 수정되었습니다. 조선신궁은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거하여 가져갔지만,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에 이르러서야 철거에 들어갔지요. 조선총독부 건물은 1982년까지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로는 문화재를 보관하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사를 살펴보면, 조선총독부 건물의 보존이냐, 철거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입장에 대립하여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하는 게 옳다는 입장,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물이라는 입장도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광화문의 온전한 복원과 세종로의 광장화는 노무현 정부 말기에야 추진되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2009년 7월 말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광화문의 복원은 2010년 8월에야 완료되었지요. 광화문이 제 자리를 찾고서야 북한산, 경복궁,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도시 축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세종로의 16개 차로는 10개 차로로 줄고, 세종로의 중앙부는 폭 34m, 길이 557m의 광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특별한 행사 시에는 차량을 통제하고 100m의 광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요. 세종로 중앙의 은행나무도 이식되었습니다.
세종대왕 동상 (출처 : 광화문광장)
현재의 광화문 광장은 역사 회복, 육조거리 재현, 대표 광장, 시민참여 광장, 도심 속 광장 등 여러 테마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광화문에서 바로 이어지는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에는 월대의 일부와 해태상을 복원하였고, ‘육조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에는 육조거리를 형상화한 축소모형이 설치되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앞 ‘한국의 대표광장’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서 있고, 지하에는 전시관이 들어섰지요. 세종문화회관과 이순신장군 동상 사이에 있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광장’에는 전시와 편의시설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 동상 주변은 ‘도심 속의 광장’으로 분수가 설치되었습니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은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 자연공간의 조망, 육조거리의 재현이라는 의미를 담고자 했습니다.
광화문 광장 분수 (출처 : 광화문광장)
2009년 광화문 광장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82%의 응답자가 만족한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개선사항으로 도로와 가까워 안전사고 우려, 햇빛을 피할 그늘 부족, 벤치 등 휴식 장소 부족, 전반적인 안내시설 부족 등이 언급되었지요. 반면, 전문가들에게는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2013년 조사한 '해방 이후 최악의 건축' 투표에서 100명의 전문가 중 6명에게 표를 받으며 최악의 건축 14위에 선정되기도 했지요.
전문가들이 지적한 광화문 광장의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분리대’, ‘거대한 교통섬’ 등의 지칭은 광장으로서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광장은 양쪽으로 5차선의 도로에 끼어있으며, 광장 위쪽은 사직로가 가로질러 광장과 광화문을 분리하지요. 보행자의 자연스러운 접근이 어렵다는 점은 광장의 기능에 치명적입니다. 한국적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 점, 지나치게 많은 인공 조형물들의 부조화도 지적사항이었습니다.
완공 초기에는 광장 운영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꽃밭과 스케이트장, 각종 이벤트에 사용됐고, 홍보 이벤트장이냐, 놀이공원이냐는 비난을 받았지요. 광장의 사용이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인 점도 문제였습니다. 오세훈 시장 시절의 서울시는 광장에 많은 예산을 사용하여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였으나, 집회나 시위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서울시의 허가 여부에 따라 1인 시위가 불법 집회가 되기도 했고, 관제 광장이라는 비판도 있었지요.
이에 광화문 광장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서울시는 광장의 운영 방침을 '채움'에서 '비움'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은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광장으로써 부족한 점은 사용자인 시민이 채워 넣었습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지며 시민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로 남게 되었지요. 전 세계에서 부러워하던 광화문 시위는 정권교체로 이어졌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앞으로도 변화할 예정입니다. 아직 훼손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 월대가 복원되고, 해태상은 제자리를 찾겠지요. 보행자는 신호등 앞에서 기다려야하는 지금보다 쉽게 광장에 들어설 수 있을 겁니다. 2016년 5월부터 현재까지 광화문 광장의 재구조화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문가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도 참여하고 있지요. 더디지만 끊임없는 토의를 거쳐 마련될 광화문 광장의 모습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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