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 입사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벌써 '선배님'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약 4개월의 그룹연수, 관계사연수를 거치고 현장 OJT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아직 햇병아리같은 삐약이 신입사원의 모습으로, 가을 하늘처럼 해맑은 모습으로
내 옆을 지나가는 누구에게든 90도로 허리를 꺾어 거침없이 인사를 하곤 했다.
그리고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점차 건설현장이 내 집인 양 자유롭고 편해지면서,
나의 풀네임은 [가재울 뉴타운 재개발 3구역현장 관리사원 김지연]이다.
'감사합니다, 삼성물산 가재울현장 김지연입니다.'라는 짧은 전화 인사멘트가 입에 베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관리 직원으로써 알아야 할 총무업무, 근태 관리, 현장시재관리 등 기본이 되는 일들을 익히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다양한 직급과 저마다의 색깔로 업무에서 열정을 다하는 가재울 식구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외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도시, 그런 주거공간을 계획하고 싶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면접에 임했던 나의 지난 여름....정말 난 지금 그 말을 실현하기 위해 가재울 현장에 와 있는 것 같다.
가끔 조용하다 싶다가도 재미나고 다양한 에피소드가 매일같이 빵빵 터지는 가재울 현장에서의 삶은
하루종일 가족들과, 친구들과 붙어 있던 학생 때에서 벗어나, 깨어 있는 하루 동안은 동고동락하는,
'직장선후배'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애틋함을 선사해주었다.
대학시절만 해도 내가 건설현장에서 안전모 쓰고 각반을 차고 근무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 봤다.
건설현장이 뭘 어떻게 하며 어떤 분위기인 것도 몰랐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도시공학도로써 겉으로 번지르르해 보이는 사회적, 지리적, 공익적 지식을 두루 갖춘 달변가이자
협상가로서 멋진 도시계획가의 모습을 꿈꿔 왔기 때문이다.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은 어쩌면 하나의 허상이라고 불릴 만큼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인턴십이나 공모전 등 소위 '대학생용 직업'을 몇 번 경험해보고,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약간 해 봤다는
자신에 차 있었지만 막상 회사에 입사해서 내 눈앞에 펼쳐진 대기업이라는 조직체는 굉장히 거대하고
복잡하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신세계였다.
누군가 먼저 입사했던 선배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순수하게 쳐다보는 내게 해줬던 말이 기억 난다.
"네가 그 어떤 것을 상상하든, 회사에 입사하면 상상 그 이상을 보게 될 거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입사 후 약 3개월 가량의 연수시절은 참 좋았다. 풋풋한 대학시절 새내기보다 더 학생대접을 받았던
기분이었으니. 하지만 연수가 끝남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양 어깨에 10kg 짜리 부담감이라는 벽돌이
짊어졌다.
이제는 내 이름 석자가 적힌 파티션 위의 이름표도, 내 노트북이 놓여진 내 책상도 마냥 '뿌듯함'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순 없었다. 우리 회사의 부채가 아닌 자산으로써 작은 책임이 주어진 나에게 앞으로 이 곳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지 골똘히 고민해볼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다.
공장같이 똑같은 칙칙한 유니폼을 입고 하루에도 수십 명씩 현장을 오고 가는 낯선 일용직 근로자들과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또한 왈가닥 소녀처럼 허둥대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귀여운 실수부터
거대한 오해까지 다양한 사고를 쳐 보면서, 막막했던 현장라이프에 적응해갔다.
일을 배워 나가는 그 과정 속에는 항상 격려와 따끔한 일침을 적절하게 버무려 해주셨던 팀장님과 소장님, 그리고 선배님들이 계셨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모래바람 쌩쌩 날리는 자갈바닥 언덕길을 하이힐을 신고 스커트를 입고 뒤뚱뒤뚱
출근하기도 했고, 지각이 싫어서 1시간이나 일찍 출근한 새벽, 차가운 휴게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꾸벅 졸기도 했던 나의 초창기 모습은 지금 돌이켜 보면 참 귀엽다.
이제는 운동화에 청바지에 모자까지 쓰고 고시생보다 더 편한 모습으로 '이게 바로 진정한 현장인이지!
암, 그렇고말고!'라고 끄덕거리며 새벽녘 전방 10m의 내 시야 저 멀리 보이는 경비반장님께 씩씩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오~~'를 외치며 '등교'한다.
업무도 업무지만, 내가 가장 힘들어 했던 것, 그리고 지금도 힘든 것은 바로 '출근시각' 이다.
지각하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보잘 것 없는 직장인의 태도'라고 여기는 까닭에 하늘이 무너지는 천재지변이 있어도 지각은 안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딱 1번 몸이 아파서 5분 정도 늦었던 적이 있는데, 팀장님은 그 때 아픈 나에게 위로보다는
"아픈 건 안됐지만, 관리직원으로써 본보기를 보여야지. 늦을 거면 차라리 반차나 연차를 올리도록 해."라고 말씀하셨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너무나 바른 말씀이었기에 지각이 수치스러움으로 느껴지게 된 건 그 때부터인 것 같다.
그렇지만 매번 힘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반쯤 눈을 감고 세수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40분을 달려 현장에 도착하면 항상 시계바늘은 새벽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보통은 일찍 컴퓨터를 켜서 그 날의 업무일정을 점검하고 계획을 세운다. 이른 출근시간은 특히 겨울에 정말 고통스러운데, 해 뜨는 시각이 늦은 새벽 겨울 시내버스는 정말 온 몸이 꽁꽁 어는 것 같은 냉동버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중고차를 하나 장만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현장근무로써 겨울은 그리 달가운 계절은 아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현장관리 즉, 쉽게 말해 '엄마'의 역할이다.좀더 명확하게 말하면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집안에서의 어머니의 역할이다. 자식들 뒷바라지 하고, 돈 벌어오는 남편 내조하고, 알뜰살뜰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어머니의 모습.
가끔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고, 가끔은 편안한 휴식처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도 하고, 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앞장서서 조언을 주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 바로 현장관리직의 역할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 상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수많은 복잡한 인적 네트워크가 엉켜서
인내의 시간, 조율의 시간을 거쳐 아파트가 한동 한동 자라고, 예쁘게 꾸며진다는 걸 이해하면 그러려니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많이 있고, 각 팀의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단합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그렇다. 그만큼 현장은 똘똘 뭉치는 조직이 되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곳이다. 개인주의적으로 각자의 일만 한다면 배가 산으로 가는 곳이 현장일이다.
나의 작은 노력이 공사기간이 끝난 뒤 만들어질 뜨거운 열정의 결정체, 완공된 작품의 일부를 구성할거라고 생각하면, 그 뿌듯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지만, 난 우리 현장에 꼭 필요한 작은 나사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김지연이라는 나사 하나가 없으면 형태가 바로 무너지진 않아도 삐그덕 거리다가 오작동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난 내 업무에 자부심이 크고 즐겁게 성의있게 임하고 있다.
수많은 동기와 선배들이 현장 업무에 대한 긍정적 측면 보다는 부정적이고 어려운 측면을 강조해서
해석하고 힘들어한다. 아마 앞으로 입사할 후배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이 바로 삼성물산의 Profit center인데, 현장을 소홀히 하는 직원이 있다면 우리 회사의 심도있는 장기적 발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들어올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신입사원 후배들에게 이 말 만큼은 해주고 싶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만 성공하는 곳, 모두가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하는 능력이 꼭 필요한 곳,
그런 곳이 건설현장이다. 주인의식과 즐기는 마음, 사랑하고 아껴 주는 가족같은 마음을 갖고 열린 가슴으로 현장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적응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
선배님들이 일궈 놓은 기름진 토양의 현재 우리 회사의 모습,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마음껏 그릴 수 있게
하는 색다른 도전거리들은 항상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현장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으며 세계무대로 뻗어 나갈 기반을 만들고 있는 나와 동료들의 모습이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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