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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 십자군 최후의 요새,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

Story Builder/건설 플러스

by 삼성물산건설부문 2014. 1. 1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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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방문한 여행자들이라면 이 곳에 위치한 수 백 개의 중세 유럽식 성채들을 보며 감탄하고, 동시에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천 년이 넘게 이슬람 문화가 뿌리내린 이 지역에, 어떤 연유로 이 유럽식 성채들은 건설되었으며, 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일까요?


수많은 성채 중에서도 유독 '아름답고 견고하여' 수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 있습니다. 십자군 최후의 요새로 불리며, 현재는 시리아 최고의 관광지로 자리잡은 곳,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소개합니다.

 

 

 
1. 십자군의 시대


 

크락 데 슈발리에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유럽식 성채들이 건설된 시기는 서기 1100~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학창시절 세계사 수업시간에 배운 십자군 운동기억하시나요?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수 차례 발생했고, 결국엔 실패로 끝났다고 다들 알고 계실텐데요,

 

사실 십자군 운동은 딱 한번 성공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1차 십자군 때 입니다.


'글래디에이터'로 유명한 영화감독 리들리스콧의 또 다른 명작, '킹덤 오브 헤븐'.
이 영화의 주인공 발리안(올랜도 블룸)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왕국이 바로 1차 십자군 운동의 결과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 입니다.

 


1096년 결성된 1차 십자군에는 유럽의 유수한 제후들이 각자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참여했습니다. 십자군 운동의 주역이었던 영주들은 고드프루아(독일), 레몽(프랑스), 보에몬드(이탈리아) 등이 있는데요,

 

[1차 십자군의 주축이 된 세 영주들]

 

이들은 당시 분열되어 있던 중동지역 이슬람 영주들과의 전쟁 끝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영지들을 탈환하고, 중동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2차 십자군은 이 예루살렘 왕국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으며, 2차 십자군과 3차 십자군 사이에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3차~8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지만, 그 후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레바논, 시리아 지역에 남아있는 수많은 서양식 성채들은, 1차 십자군이 이룩한 '예루살렘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며 유럽의 건축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유적이 되었습니다.
 
 


2. 예루살렘을 지키는 십자군의 방패



성채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 그리고 뛰어난 건축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자원을 투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이 수많은 성채를 건설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만성적인 '병력의 열세' 때문이었습니다.

 


1차 십자군이 성공하고 왕국이 탄생하였지만, 왕국을 구성한 이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건너온 제후들이었습니다. 이 제후들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한 이후 유럽으로 되돌아간 경우가 많았고, 현지에는 이슬람 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기에 신규로 병력을 충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분열되어있기는 했지만, 이집트 지역과 시리아 지역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포위까지 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차 십자군이 끝난 후 예루살렘 왕국의 병력은 많아야 1만을 넘지 못했는데요, 이 부족한 병력을 보완하기 위해 당시 지어진 성채는 수 백 개에 달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142개라고 합니다.

 

 

[크락 데 슈발리에와 함께 성채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Marqab', 'Belvoir' 요새]

 


높은 성벽과 탑으로 이루어진 성채는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방어가 용이할 뿐 아니라 유사시에 군사 거점이 되어 성채간의 네트워크를 형성, 연합하여 반격하기 용이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은 성채 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십자군 왕국에는 크게 두 개의 기사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템플 기사단, 그리고 하나는 요한 기사단이 그것입니다.

 

특히 '요한 기사단'(병원기사단, 구호기사단, 몰타 기사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성채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요한 기사단]

 

본래 의료를 목적으로 설립되어 군사적 목적도 겸하게 된 요한 기사단은 주로 유럽의 귀족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귀족들이 거주하는 성채 안에서 자라난 이들은 성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직접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여 관리 및 방어를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크락 데 슈발리에도 이 요한 기사단의 관리 하에 있었던 성채 중 한곳 입니다.

 


 

3. 중세 건축기술의 정점


 

원래 이슬람 영주가 건설했던 작은 요새를 요한 기사단이 수년에 걸쳐 개보수하여 완성한 지금의 크락 데 슈발리에는, 칼릴산 750미터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넓은 시야로 주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성채의 모습은 적들에게는 감히 함락시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지 않았을까요?

 

 

성채를 건설함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는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요소는 물 확보를 위한 저수조와 배수로 인데요,


오랜 시간 동안 내부에서만 생활을 하며 버텨야 하는 성채에서, 배수로가 정비되지 않는다면 오염된 물로 인한 역병이 창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물 보급을 위한 배수로의 건설은 필수였습니다.

 

특히 비가 잘 오지 않는 중동지방에서 가끔 내리는 소중한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조는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겠죠?

 

[크락 데 슈발리에의 단면도]

 

 

두 번째 요소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해자’와 ‘성벽’입니다.

 

해자는 적의 접근을 방해하기 위해 10미터 깊이로 성벽 주변을 둘러 파놓은 구덩이를 말하며, 해자 바로 옆에는 5~7미터에 이르는 성벽을 건설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성 외부와 내부를 잇는 통로는 성문의 도개교가 유일하여, 도개교를 들어올리면 성채는 완전히 외부와 차단됩니다.

 

[사진 우측에서, 내벽과 외벽 사이의 해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벽은 바깥쪽 외벽과 내부 요새를 보호하는 안쪽 벽으로 분리되는 이중 방벽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벽 요새에서 내려다본 외벽의 모습]

 

크락 데 슈발리에의 외벽의 길이는 1500미터에 달하는데요, 적이 쳐들어오면 외벽을 1차 수비거점으로 방어를 하다가, 외벽이 함락되면 다시 안쪽 벽에서 2차 방어를 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성벽 중간중간에 건설된 탑에서는 석궁을 든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적을 향해 화살을 날려댔을 것입니다.

 

[크락 데 슈발리에의 건물 내부]

 

이처럼 방어에 특화된 철벽 같은 요새였지만,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겨울에는 벽에서 새어드는 냉기를 막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목재가 부족한 중동에서는 난로를 통한 난방도 불가능했을 테니, 이 성채에 거주했던 기사들은 꽤나 추위에 시달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크락 데 슈발리에를 건설한 중세 건설인들은 아마도 기사들에게 꽤나 많은 항의를 받지 않았을까요?

 

 

그야말로 중세 유럽의 성채 건설 기술의 정점이라 볼 수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는

1187년,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세력에게 함락된 이후에도 거의 100년에 걸쳐 십자군 기사들의 방어거점으로 남게 됩니다.

 

 

1271년, 이슬람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무려 20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해 십자군 최후의 보루인 크락 데 슈발리에를 공격했지만 깊은 해자와 이중 성벽으로 건설된 요새를 쉽게 함락 할 수 없었습니다. 정공법으로는 성채를 함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슬람은, 가짜 편지를 활용한 책략을 이용해 크락 데 슈발리에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결국 크락 데 슈발리에는 무력에 의해서는 단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기록을 가지게 된 것이죠.

 

본래 유럽의 성채 건설 기술을 바탕으로 지어졌던 크락 데 슈발리에는, 오히려 훗날 유럽의 성채 건설에 많은 귀감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3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는 크락 데 슈발리에에 사용된 기술을 유럽으로 역 수입하여 성채 건설에 활용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출어람'의 사례라고 볼 수 있겠죠?

 


 

시리아 최고의 관광지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던 크락 데 슈발리에는

안타깝게도 2011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현재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훼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루빨리 내전이 끝나 크락 데 슈발리에를 비롯한 중동지역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자료 참고:  '십자군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www.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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