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편
건축 작품 이야기
# Prologue
1986년 6월 14일 5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타계했던 김수근은 한국현대건축의 큰 형님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며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931년 2월 20일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동에서 김용환과 김우수달의 장남으로 태어나 ‘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한 ‘벽산빌딩’ 등의 하이테크적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근 230여 개의 작품을 남겼다. 1952년에 동경예술대학교에 입학 후, 요시무라 준조, 프랭크로이드 라이트, A.Raymond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후, 1959년에 박춘명, 강병기와 함께 국회의사당 설계경기에 참여하고 당선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귀국하여 설계사무소를 오픈하며, 1963년 최순우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전통미에 대한 혜안을 터득한다. 1971년 범태평양 건축상을 수상하며 ‘궁극공간’과 ‘문뱡공간’을 같은 한국적 공간의 원형을 이야기 하게 되며, 1980년 UIA동경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건축의 네가티비즘’을 선언! 동양적 사상에 기반을 둔 여유가 있는 공간을 주장하게 된다.
# 신념은 건축가의 능력인가?
통상 훌륭한 건축 작품은 건축공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창의적 해결을 위한 부단한 반복 과정을 통해 구축된다. 이때 디자이너는 심미안, 해석력, 창조력 등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질만으로는 심금을 울리기 어렵다.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정신이다. 즉,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를 꼭 이루려는 진정성이다. 진정성은 작품을 이루는 동력이다. 이는 또한 방향과 목적에 전반적인 색채를 통일 시켜주는 일종의 나침반과 같다. 이런 까닭에 결정적인 판단은 건축가의 진정한 정신에 따라 행하게 된다. 그것을 건축가의 ‘신념’이라 해보자.
그렇다면 건축가의 신념은 무엇일까?
신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상(事象)이나 명제(命題) ·언설(言說) 등을 적절한 것으로서, 또는 진실한 것으로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심적(心的) 태도’로 정의된다. 여기서 심적 태도란 일정한 정신적 반응의 형태를 의미한다.
한편,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반응의 형태를 지식, 감정, 의지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특히, 이중에서 의지가 그 근본을 이루고 지식과 감정은 그 상부기능으로 본다. 이처럼 의지는 신념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자인 것이다. 디자인 활동은 언제나 목적 실현의 과정이며, 이러한 활동은 의지에 기반한 활동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디자이너에게 신념이라는 것은 의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작품을 향한 일종의 태도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신념은 디자인 프로세스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까?
첫째, 신념은 작품의 컨셉으로 나타난다.
둘째, 신념은 작가의 역사관을 표현한다.
세째, 신념은 작가의 개성을 담고 있으며 또한 성취동기로써 작용한다.
넷째, 신념은 때때로 작품구현에 있어서 해가 되기도 한다. 이는 잘못된 가치관의 폐해다.
다섯째, 신념은 디자인의 최종단계가 되기도 한다. 엇비슷한 대안을 판단해야할 경우, 작가의 태도에 따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증거를 그의 작품 속에서 찾아보자
# 작품에 꽃피운 한국성, 그의 신념
케빈리치는 도시의 이미지를 “이미지의 일관성은 여러 가지로 일어 날 수 있다. 비록 질서를 부여하거나 특기할만한 실제 오브제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심상은 오랜 친근감을 통해서 그것의 정체성과 구성을 획득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학로에는 유독 김수근의 작품이 많다. 이들은 컨셉, 역사관, 개성 등 신념에 기반 한 일련의 이미지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그럼 김수근의 정체성을 보자.
# 문예진흥원 전시장 (1977-1979)과 공연장 (1977-1979)
그는 현재 전시장이 있는 부지에 세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대지를 포함한 마로니에 공원 전체를 문화 컴플렉스로 만드는 안을 문예진흥원에 제안하게 된다. 당시 상임 부위원장으로 있던 최창붕이 이를 동의 하게 되어 본격적인 설계가 이뤄진다. 2층으로 이어지는 램프와 피로티로 이뤄진 통과 공간이 독특한데, 이들 공간은 다양한 그의 신념을 담고 있다.
첫째, ‘해프닝이 있는 스페이스’, 이는 스페이스의 연출에서 치밀한 계획아래 실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도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둘째, ‘궁극공간(ultimate space)’ 이는 한국의 주택에 있는 ‘문방’ 처럼 놀이와 일이 동시 발생적이며, 조화 속에 공존하는 것이다. 셋째, ‘김수근이 갖은 대중성의 신념’을 담는다. 그에게 길이란 “집과 집 사이, 건물 사이의 공간들로 구성된 도시의 거실이요, 놀이터요,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이 연출되는 무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벽면의 벽돌부조는 김수근이 직접 설계한 것으로 당시 김수근의 ‘자유의지’를 보여 준다.
# 해외개발공사(1977-1979)와 샘터사옥
해외개발공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생긴 대지에 지어진다. 건물의 전면엔 오래된 수목이 자리하고 있다. 김수근은 두 개의 엇갈린 삼각형형태의 매스를 중정이 있는 기다란 직사각형의 아트리움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샘터사옥은 다양한 문화적인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 3층에는 ‘샘터’지를 위한 사무공간이 있고, 지하에는 파랑새극장 이라는 소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1층의 화랑과 카페, 4층에는 사무소가 입주해 있다.
이 건물들은 김수근이 1980년의 UIA동경회의의 기조연설에서 밝힌 ‘건축에서의 네가티비즘’에 관한 신념을 담고 있다. 이는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동개념이 아닌 최소수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불행이나 고통을 가져오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구체적인 공간형태로써, 첫째, ‘적정공간(Appropriate Space) ’은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적정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건축을 지양하자는 것이다. 둘째, ‘통합공간(Intergrated Space)'란 가능한 기능적으로 애매하면서도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셋째, ’기분공간(Mood Space)'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태아가 성장해 감에 따라서 커져가다가 해산 후에는 본래의 크기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프렉시블한 구조적 유연성을 가진 공간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 전통의 숨결, 공간 사옥
구 공간사옥은 독특한 단면형태를 보인다. 즉, 스킵프로어 형태로 주 동선을 가운데 두고 공간이 연속된다. 이러한 형태는 경사진 대지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4층과 5층은 스킵프로어가 아닌 플랫트한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의 공간사랑은 공옥진의 병신춤이 추어지고 판토마임과 연극도 공연되어 수시로 해프닝이 일어났던 ‘궁극공간’이다.
신관은 공간연구소가 중동진출로 확장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구관과 달리 콘크리트 구조를 사용하여 공간의 프렉셔빌리티를 높히고 유리를 치장제로 사용 했다. 신관설계를 통해서 김수근은 전통적인 매개공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옥의 대청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이 공간을 통해서 적정한 스케일로 페쇄성과 뒷뜰과의 상호연계되며, 공간적인 역동성을 가진다.
# 도시의 이단아, 세운상가 (1967-)
종로 3가 재개발은 김수근이 한국종합기술공사 재식시설 계획한 도시계획 중 유일하게 실현된 프로젝트이다. 이 계획은 르꼬르비제의 1930년대 알제리의 오뷔스계획에서 이미 재시된 것으로, 1960녀대 유럽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세운상가는 르고르비제의 유니테따비시옹의 경우처럼 4층 옥상에는 4개의 공원과 각가지 어린이 놀이터가 마련되고, 건물 옥상에는 상주자들의 자녀를 위한 12학급 규모의 초등학교가 건설되도록 계회되었다. 하지만 인공테크로 표현된 이 도시의 괴물은 도시 녹치단절과 같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는 신념이 과도하게 구현된 사례이다.
# Epilogue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의 기반을 마련했다.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신념’이라는 작가 스스로 만들어낸 동력이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의 신념은 ‘전통공간계승에의 신념’, ‘민중을 주체 본 대중적 신념’, ‘사회를 선도하려던 개척자로서의 신념’, ‘ 일의 추진과정에서 개성으로 나타난 신념’ 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면면히 작품 속에서 숨 쉬고 있는 가치들이다. 신념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써, 정량화와 가시화가 어렵다. 그러므로 본 글이 주장하는 바에 다소간 논리의 비약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주관적인 호불호, 옳고 그름의 판단은 이글을 읽는 독자의 소중한 ‘신념’에 따라 해석되는 것이 좋겠다. 그 차이와 종류가 많을수록 풍부한 즐거움이 있을 듯 싶다.
* 본 원고는 2006년 ‘한양대 건축디자인‘ 강의록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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